목요일 밤 연구실에서 이것 저것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있을 때, '오늘 피겨 결승전 봐야지'하는 아내의 말에 혹해서 9시쯤 집에 돌아왔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에게 피겨란 김연아 전 (Before Yu-na)과 김연아 후 (Anno Yu-na)로 나뉜다. AY 1년은 AD (Anno Domini) 2007년 그러니 올해는 AY 4년인 셈이다. 간혹 동계 올림픽이나 혹은 일요일에 채널 돌리면 어쩌다 걸리는 피겨 스케이팅 중계는 해설자의 중성적이고도 건조한 해설과 어쩔 수 없이 피겨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의 그보다 훨씬 더 말라비틀어진 중계로 인해 미끄러운 빙판 위가 아니라 사하라 사막 위의 낙타 랠리를 보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그러나, 그렇다. 연아 이후로, 적어도 한국 사람에게, 피겨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설이 길었는데 집에서 NBC를 틀어보니 딱 피겨스케이팅 중계가 시작된다. 피겨 프리 마지막 조, 미국의 플랫, 일본의 안도 미키, 김연아, 아사다 마오, 캐나다의 조안나 로셰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의 미라이 나가수 순이었다.
플랫은 잘 모르는 선수고, 안도 미키부터 내 나름의 촌평을 하자면,
우선 해설자들의 코멘트부터 '빵' 터졌었는데, 그들 왈 '클레오파트라' '안무가 없고 점프만 있음 (A lot of jumps but no choreography)' 이랜다. 뭐 처음보는 공연이니 최대한 편견을 자제하려고 보려했으나 그 자제심은 30초가 안 되어 날아갔는데...
우선 의상이 좀 그렇다. 오리엔탈리스트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건 정말 클레오파트라다. 어쩌면 피부색도 까맣게 태웠을 수도 있고, 화장을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는데 사진보면 더 잘 다가오겠지만 허걱~
다음으로 문제의 안무(choreography). 프리는 7번인가 8번의 점프를 4분여의 시간 동안 모두 시연해야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니까 대체로 전반부에 대다수의 점프가 이뤄지도록 안무를 짠다 (그래서 후반부 점프에 10%의 가산점을 준다.) 그런데 안도는 안무는 정확히 전반 2분의 점프와 후반의 2분의 안무로 나눌 수 있다. 해설자들도 별달리 할 말이 없는지 매우 조용하고 침착했다. 그렇다. 안도는 완전히 21세기 밴쿠버에 클레오파트라로 나타나 우리 모두를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로 날려줬다.
연아의 차례. 그런데 해설자들이 좀 '연아 빠'같다. 이건 쇼트 프로그램할 때부터 느꼈던 건데 첫 트리플 러츠와 토룹 콤보에서부터 '스피드가 다르죠'에서 시작해서 심지어 마지막 마무리에는 'oh my goddess, this is glorious, it's one of the greatest Olympic performances that I have ever seen' 'long live the queen.'라는 찬사로 마무리. 특히 마지막 눈물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점수도 채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그리고 그녀 뒤에는 3명의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그 눈물은 '내가 이겼다'가 '내가 해냈다'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다. 점수는 보지 않아도 되었다. 설령 1위가 아니더라도 너무나 좋았을, 하지만 동시에 당연히 1위일 것 같은 점수였기 때문이다.
동영상은 여기-> http://www.nbcolympics.com/video/assetid=e554cf17-5d3c-4531-9dc6-c9a9cf5eec06.html#queen+yu+na+crowned+kim+wins+gold
다음은 아사다 마오.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올림픽은 아사다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던 것 같다. 우선 연아 뒤에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그렇고, 연아가 너무 잘했다는 것이 그렇고, 무엇보다 쇼트에서 완벽에 가까운 공연을 펼쳤음에도 - 아사다는 쇼트를 마치고 울먹였다 - 연아가 그 중압감을 가볍게 이겨냈다는 것, 그러나 아사다는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나 힘들었을 것 같다. 사실 아사다는 한 대회에서 트리플 악셀을 3번 (프리 2번, 쇼트 1번) 성공시킨 첫 여성 피겨스케이터였는데 그 이외에는 두드러지는 점이 없었다.
김연아와 두 일본 선수들을 비교해보면 연아의 경우 음악과 기술의 시연이 완벽한 싱크로를 이루고 있어서 이것이 빙판위에서 미끄러지듯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몸으로 느끼게 해 주지만, 안도와 아사다의 경우 음악과 공연이 다소 따로 노는 감이 있어 왜 반드시 저 음악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굳이 음악을 틀고 점프를 해야하는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때가 많다. 덧붙여 점프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도...
로셰트의 경우 김연아 프레셔가 거의 작동하지 못한 경우인데, 그녀는 불과 나흘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한다. 그것도 몬트리올에서 밴쿠버로 딸 응원하러 오다가... 상당히 잘 했었는데 아사다와 비교해보면 프레셔를 느끼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펼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연기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것은 미국의 16세 미라이 나가수였는데, 사실 자기 앞에 금,은,동 연기가 끝나면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맥빠지기 쉬운데, 미라이는 그런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기를 너무나 잘 한 듯 보인다. 내 느낌으로 김연아를 제외한 5명 가운데 가장 김연아와 비슷한 사람이 미라이였다. 어쩌면 2014년 동계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지도 모르겠다.
김연아의 피겨는 보는 내내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화제가 되었던 오셔보살의 사진
1 comment:
아... 성시백 500m 금메달 딸 수 있었는데...
그래도 은메달 두 개 따서 잘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쇼트트랙.
김연아는 진짜 감동...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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